“좋은 일을 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삶의 질도 올라갑니다. 사실 그러면서 노는 거예요”


격한 사랑의 감정도, 푸근한 모성도, 왕비의 품위도 김여진이라는 잔에 담으면 근사한 그림이 됐다. 어쩌면 그녀의 절묘한 균형 감각 덕분에 김여진이라는 그릇을 그동안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스크린에서, 브라운관에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빛나는 그녀의 존재감이 정말 반가운 때다. (편집자 주)

김진세 오늘 아침에 생방송 하고 오셨죠? 실은 제가 그 프로그램에 초대를 받았는데 일정상 가지를 못했어요. 하루에 두 번 뵐 수도 있었는데(웃음). 요즘 일이 많으시죠?

김여진 지금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 출연하고 있어요. 드라마라는 작업이 거의 ‘전부’를 요해요. 일주일을 스탠바이 상태로 있어야 하기도 하고요. 지금 제가 드라마상에서 잠깐 죽었어요. 다른 역할로 다시 나오기 전까지 2주 쉬는데, 그거는 참 좋아요.

김진세 요즘 여진씨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참 다양하잖아요. 홍대 청소 노동자들과도 함께하셨고, 해군기지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에도 가시고, 국보법 위반으로 연행된 대학생들 만나러 경찰서로 달려가시고요.

김여진 사람들은 힘들지 않느냐, 부담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저는 평안할 때보다 요즘이 다이내믹하면서도 즐겁고 행복해요. 조건이 나쁘고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닌 거 같아요. 전 오히려 지루한 걸 못 견뎌요(웃음).

김진세 여진씨에게는 어떤 게 행복이에요?

김여진 어떤 게 행복일까, 사실은 그냥 아는 거 같아요. 그냥 제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분명히 있고요. 그것들을 굳이 이름 붙여서 분류를 해보자면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는 거죠. 즐겁기만 해서는 행복까지는 안 가는 거 같고. 뭔가 가슴 벅차는 감동이 있고 또 의미가 있을 때, 가장 크게 행복감을 느껴요.

김진세 정답이네요. 긍정심리학의 권위자 마틴 샐리그먼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거든요. 단순한 재미만 누린다면 언제고 그 만족감은 없어지는 법이죠. 의미가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게 행복이거든요.

김여진 사실 이건 홍대 청소 노동자 일을 겪으면서 확실히 느꼈어요. 그 전에 JTS(법륜 스님이 세운 기아·질병·문맹 퇴치 시민단체 - Join Together Society)와 평화재단 활동을 하면서 그런 느낌들을 약간씩 맛봤어요. ‘사람들이 이래서 돈이 안 되어도 남을 돕고 사회 개혁을 위한 일을 하는구나’라고 느꼈죠. 물론 성과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뿌듯한 마음이 드니까요.

매사에 적극적인 호기심 소녀
김진세 어릴 때는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한데요.

김여진 저는 일단 호기심이 많아서 뭐든 직접 해보고 싶어 하는 성향이 강했어요. 책 읽는 거 좋아했는데, 읽고 나면 항상 그 내용을 따라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나요.

김진세 그중에 생각나는 책이 있다면요?

김여진 펄 벅의 「대지」를 좋아해서 어릴 때 청소년 문고판을 백 번도 넘게 읽었어요. 읽고 또 읽고, 틈만 나면 읽고, 하루 종일 「대지」 속에 파묻혀서 산 날도 있었어요. 동생들한테 나는 “오란을 할 테니, 너는 왕릉을 해라”하고 시키고(웃음). 지금 생각하면 ‘아, 내가
연기를 하면서 놀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진세 남다르게 노셨는데요(웃음).

김여진 한편으로는 엄마나 선생님으로부터 꼭 칭찬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어요. 그래서
공부도 항상 1등을 해야 했고, (수업시간에는) 항상 손을 들어야 했죠. 엄마가 이런 얘기도 하셨어요. “1등 하는 건 좋은데, 손들지 마라(웃음).”

김진세 왜요?

김여진 다른 아이들에게 미움 산다고요(웃음). 그런데 그걸 못 참고 늘 먼저 손을 들었던 거 같아요. 반장도 하고, 잘 부르지도 못하면서도 앞에 나가서 노래도 하고(웃음).

김진세 굉장히 적극적이었네요. 그 점은 누구를 닮으신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김여진 두 분 다 안 닮았어요.

김진세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데요?

김여진 엄마한테는 무뚝뚝하신 거 같은데, 저한테는 참 자상하셨어요.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눴고, 존중해주셨어요. 아들처럼 생각하신 거 같아요. 딸 셋의 맏이라 그러셨나 봐요. 아버지가 우시는 걸 본 적도 있어요.

김진세 진짜요?

김여진 “오늘 이런 일로 속상하다”며 제 손을 잡고 우신 적이 있어요. 그럼 저는 “아빠, 괜찮아”라고 해드리기도 했고요. 경상도 남자에, 정치적으로는 꽤 보수적인 분이셨는데 제 의견을 잘 들어주셨어요. 논쟁이 붙을 때도 있었는데 그걸 즐기셨어요. 저는 어리니까 말도 잘 못하겠고, 아빠랑 말싸움하면 질 거 같고, 눈물도 나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아버지는 “자, 눈물 닦고 물 한 잔 마시고 진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얘기해봐”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나요.

김진세 ‘100분 토론’에 출연하셨을 때 보니 정말 논리적이셨어요. 꼭 트레이닝 받은 사람처럼 자기 논리를 끌어가는 힘이 강하더군요.

김여진 저는 싸움이라는 걸 할 때 적대적이지 않아요. 보수적인 어른들의 생각이나, 왜 그렇게 말씀하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어떻게 얘기해 가야 하는지도 알아요. 그건 아버지로부터 배운 게 크죠. 저는 아버지한테는 사랑받는 딸이었어요. 엄마한테는 반항하는 딸이었고요(웃음).

김진세 부모님은 지금 고향 마산에 계세요?

김여진 네, 두 분 다 젊으세요.

김진세 젊다고 하시면 얼마나?

김여진 이제 환갑 갓 넘기셨어요. 스물 둘에 저를 낳으셨거든요. 아버지는 군대도 안 가셨을 때고요(웃음). 초등학교 때까지도 아버지랑 다니면 “오빠냐, 막내삼촌이냐” 소리도 들었어요.

김진세 그러셨군요. 아까 말씀하신 아버지의 토론 문화, 이런 건 참 좋아요.

김여진 제가 굉장히 감사한 부분이, 두 분 다 어린 나이에 자식을 낳았는데도 최상의 환경을 제공해 주신 점이에요. 저를 정말 존중해주셨죠. 소위 여성 차별이라는 걸 저는 자라는 동안 한 번도 겪지 않았어요.

의대 대신 독문학과! 생애 첫 반항기
김진세 청소년기에는 어떠셨어요?

김여진 중학교 때까지는 정말 시험의 지배를 받았어요. 중1 때부터 밤 11시면 잠들고 새벽 5시면 일어나서 공부했어요. TV도 하루에 한 프로그램만 봤어요. 애니메이션 ‘바람돌이’요.

김진세 제목이 뭐라고요?

김여진 ‘모래 요정 바람돌이(모래 요정이 하루에 한 가지씩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내용을 담은 1980년대 인기 애니메이션)’요. 그걸 되게 좋아했어요(웃음).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웃음). 그거 한 편 보는 게 낙이었고, 나머지 시간은 다 공부했어요.

김진세 자의적으로요?

김여진 그때 마침 읽었던 책이 「퀴리 부인 전기」였는데, 그녀가 치열하게 공부하는 모습이 멋있었어요. 나도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웃음). 그래서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규칙을 만들었어요. 그러곤 중학교 입학 후 첫 시험에서 ‘올백’을 맞고 전교 1등을 한 거예요. 그러고 났더니 이후 시험에서는 한 문제를 틀려도 “너는 할 수 있는 아이니까”라며 엄마가 틀린 개수대로 매를 드셨어요. 그러니까 저는 1등을 해도 맞은 거예요(웃음).

김진세 물론 그 당시 엄마들이 다 똑같았겠지만, 유독 호되게 하신 건 여진씨가 큰딸이라서 그런 건가요?

김여진 뭐 그런 것도 있었고, 제가 집안 아이들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으니까 “여진이는 꼭 의사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꼭 서울 의대를 가야 한다”고 어른들이 결정을 해버리신 거죠. 저도 ‘공부하는 게 좋다’고 스스로 세뇌를 해서 또래 친구들하고도 잘 안 어울렸어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거든요.

김진세 친구가 참 소중할 때인데요.

김여진 그랬다가 고등학교 때 참 소중한 친구를 만났어요. 당시 저는 혼자 공부하고 혼자 음악 듣는 걸로 충분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친구가 제 이어폰을 빼서 듣더니 “산울림이네!” 하는 거예요. 여느 아이들은 그 음악을 잘 몰랐거든요. 그 친구와 같이 음악 듣고, 얘기 나누면서 제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다 뒤집어졌죠.

김진세 여진씨와는 좀 다른 친구였나요?

김여진 당시 저는 제도권에서 1등을 하는 아이였다면, 그 친구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였어요. 굉장히 영민하고 감수성도 예민했고요. 그때 전혜린의 책을 같이 읽으면서 제가 독문학과에 가기로 결심한 거예요. 원래 이과였는데.

김진세 그래서 정말 독문학과를 가셨군요! 원래 고집이 센가요?

김여진 웬만하면 순하게 하는 편인데,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아무도 못 꺾어요. 한 번도 꺾인 적이 없어요. 사실 독문학과 간 게 처음이었고요. 대학 가서 운동했던 거, 연극 시작했던 게 그랬고요. 이번에 홍대 건도 아버지는 전혀 놀라지 않으시더라고요(웃음).

김진세 (웃음)

김여진 그런데 제가 의대 진학을 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는 부모님이 굉장히 큰 충격을 받으셨어요. 두 분 다 식음을 전폐하시고.

치열한 투쟁과 사랑의 계절
김진세 그렇게 간 대학생활이 궁금한데요.

김여진 막상 독문학과에 진학해보니 혼자서 공부했던 거 보다 재미가 없는 거예요. 오로지 시험 공부하는 거였으니까요. 그러던 중 입학한 지 한 달여 만에 강경대 열사가 돌아가셨어요. 충격이 컸죠. 동갑내기 같은 91학번이 집회에 나갔다가 전경한테 맞아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경찰이 어떻게 백주대낮에 사람을 때려서 죽이나 싶었죠. 그래서 혼자서 추모집회를 찾아갔고,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됐어요. 제가 여태까지 믿어왔던 모든 게 거짓이었다는 걸요.

김진세 그때부터 학생운동에 뛰어드신 거군요.

김여진 총학생회 중심의 주류 학생운동은 아니었고, 저는 연대활동이라고 해서 농활을 가거나 철거 지역을 찾았어요. 산업재해 인정받으려고 투쟁하던 원진레이온 근로자분들한테 가기도 했고요.

김진세 혹시 그때 연애는 안 하셨어요?

김여진 했어요(웃음). 같이 운동하는 사람이었어요.

김진세 서로에게 어떤 사람이었어요?

김여진 저는 하고 싶은 게 늘 분명했거든요. 그 사람은 저를 굉장히 좋아하고 예뻐하고 옆에 있으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라 제가 하자는 대로 했어요(웃음). 공학도였는데도 저랑 책도 같이 읽고요. 무뚝뚝하고 별 말 없이 궂은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게 멋져 보였어요. 학생운동을 하긴 했지만 두 사람 다 첫사랑이었고 연애하는 그 순간은 여느 대학생과 똑같았어요.

김진세 그만큼 순수했다는 뜻이겠죠?

김여진 요즘 흔히 말하는 밀고 당긴다거나, 조건을 따진다거나 그런 거 없이 정말 헌신적이었어요. 당시에는 휴대폰이라는 게 없었잖아요. 그 사람은 도망 다니기도 했으니까, 둘이 만나기 좋은 조건이 아니었음에도 제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선가 늘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이후에 연애를 해도, 다른 남자들은 안 그렇더라고요(웃음).

김진세 운동권 학생들에게 ‘연애질’은 죄악시되던 분위기였잖아요?

김여진 그런 게 있었죠. 그 점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했었죠.

김진세 그럼 연극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어요?

김여진 그 사람이 집행유예 2년형을 받는 바람에 군대를 안 가게 됐어요. 마음 놓고 연애를 하다가 학생운동은 4학년 2학기 때 그만뒀어요. 대학은 졸업해야겠더라고요. 그동안 부모님을 속여왔잖아요.

김진세 학점은 괜찮았어요?

김여진 많이 모자랐죠. 다들 졸업 못할 거라고 했는데, 마지막 한 학기 동안 다 채웠어요.

김진세 운동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가 졸업 때문이었어요?

김여진 그렇진 않고요.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면, 운동을 해나가는 게 일상이 되니까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 안에서 숨이 막히고 ‘이렇게 하는 방법밖에 없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요. 또 집회를 나가서 내가 왜 저 전경에게 욕을 하고 화염병을 던져야 하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저 사람 잘못이 아닌데…. 그렇잖아요?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그러다 아예 철거촌으로 들어갔죠. 거기는 싸움을 하고 막아야 집을 못 부수니까요.

김진세 목적이 분명한 싸움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김여진 청량리1동 철거촌에서 2년을 지냈어요. 결국 (주민들이) 영구임대주택을 받아냈어요. 당시로서는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해야 할 일이 분명하고 성과가 보이면 괜찮은데, 정확히 의미가 뭔지 모르는 일에는 금세 지치더라고요. ‘당위’로는 못하겠는 거예요. 학생운동을 그만둘 때는 힘들고 지쳐서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김진세 많이 힘든 때였군요.

김여진 그땐 정말 ‘아, 죽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괴로워서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요. 취직 같은 건 생각도 없었고 하기도 싫었어요. 그 와중에 남자친구가 사면복권이 돼서 군대를 갔어요(웃음).

김진세 그런 중요한 시기에?

김여진 정말 철저하게 혼자가 된 거예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혼자가 처음 돼봤어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죠. 그러다가 연극을 보러 갔는데, 그게 재밌었어요. 새로운 세상이 보인 거예요.

절망 끝에 만난 연극이라는 신세계
김진세 그때 연기를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예요?

김여진 연극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고 싶었어요. 새로운 세상을 접해보고 싶은 마음에 대뜸 “포스터 붙여드릴게요(웃음)”라고 말씀드렸죠.

김진세 무대 올라간 것도 재밌는 사연이 있던데요. 주연배우가 그만두는 바람에?

김여진 네, 당시 주인공이던 박상아씨가 슈퍼탤런트가 돼서 제가 대신 무대에 올라갔죠.

김진세 굉장한 행운이잖아요, 그죠?

김여진 아주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건데, 간혹 일어나긴 하죠.

김진세 그런데 두 달 동안 정말 포스터만 붙였어요?

김여진 아니죠. 하루 두 번하는 공연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일 봤어요. 똑같은 연극을 100번 봐도, 100번이 다 재밌더라고요. 배우들의 호흡과 관객의 호흡이 매번 다른 거예요. 거기에 희열이 있었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대사를 외웠죠. 단원들 중에 그렇게 매 공연을 다 보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는데, 그걸 대표님이 아셨던 거예요. 그래서 “너 매일 보니까, 대사 외우지? 올라가봐”라고 하신 거죠(웃음). 나중에 들어보니까 다른 배우들이 훨씬 떨었대요. 제가 무슨 실수를 할지 모르니까 긴장해서(웃음).

김진세 진짜 드라마틱하네요.

김여진 그런데 직업이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1년간 같은 공연을 하면서 연기라는 걸 혼자 배웠어요. 그 사이 다른 배우들은 다 바뀌었는데 저는 은혜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웃음), 돈도 거의 안 받고 했거든요.

김진세 진짜요?

김여진 그때 연봉이 한
100만원? 정말 가난하게 산 거죠.

김진세 집에서는 뭐라고 하셨어요?

김여진 공연을 보신 부모님은 딸이 재롱 피우는 거 같으니까 귀엽게는 봐주셨어요. 또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애가 아닌 걸 아셨기 때문에 놔두면 제풀에 관둘 거라고 생각하셨대요. 그런데 아버지는 은근히 즐기신 게, 제가 극장을 옮길 때마다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툭툭 지나가는 말처럼 “지난번보다는 좀 낫다”라고도 하시고요. 반면 어머니는 오실 때 마다 “선생이라도 해라!”하고 하시고, 저는 “그건 아무나 시켜주는 줄 알아”라고 대꾸하고요(웃음). 그래도 제가 연기를 직업으로 삼을 거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어요.

김진세 본격적인 연기는 언제부터 하셨어요?

김여진 1년간 같은 연극을 하다가 나와서 두어 달 동안
출판사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김진세 극단은 왜 나왔어요?

김여진 말도 안 되는 케이스로 무대에 올라갔으니까 얼마나 많은 질투를 받았겠어요? 또 1년 정도 하다 보니 이게 내 길인지도 잘 모르겠고, 돈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김진세 그런데?

김여진 출판사를 다니다 보니 아, 연극해야겠다!(웃음). 책을 좋아하긴 했는데, 만드는 작업은 소질에 안 맞았어요. 그래서 극단 연우무대의
오디션을 보고 들어간 거죠.

김진세 그때 결정을 잘하신 거네요.

김여진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헷갈릴 때는 일단 해보는 게 좋은 거 같아요.

김진세 네에?

김여진 그러니까 어떤 일이 내 일인가, 아닌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만둬보면 알고요. 또 내 일이 아닌 것도 해봐야 아는 거 같아요. 머리로 고민해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거죠.

진정한 행복은 ‘더불어 행복’
김진세 저는 여진씨를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처음 봤어요. 이후 TV에서도 뵐 수 있었고, 그때부터는 승승장구했나요?

김여진 무난한 편이긴 한데, 굴곡은 있었죠. 이런 건 있어요. 제가 마음에서 느끼는 행복과 성공이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는 거요. 제가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청룡영화상) 신인상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금세 뜰 줄 알았죠(웃음). 그런데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 다음에는 ‘박하사탕’에 출연하고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았어요. 또 팍 뜨진 않고(웃음). ‘박하사탕’을 문소리씨랑 같이했잖아요. 이후 문소리씨는 ‘오아시스’로 베니스영화제 신인상 받고, 저는 ‘취화선’으로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을 받았어요. 그때 사실 생각이 많았어요. ‘박하사탕’에서 내가 생각해도 연기를 꽤 잘한 것 같은데, 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창동 감독님이 나를 캐스팅하지 않았을까? 왜 내가 안 됐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드라마를 꽤 여러 편 했는데 그다지 즐겁게 일하지 못한 거 같아요. 연기를 하는 그 몰입의 순간은 좋은데, 평소에는 약간 우울감이 있었죠.

김진세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김여진 ‘대장금’, ‘이산’ 등에 출연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줬는데, 저는 별로 성에 차지 않아서 뉴욕으로 연기 공부를 하러 가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JTS 활동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김진세 그때가 언제인가요?

김여진 2008년이었어요. 법륜 스님을 뵈었는데 굶어죽는 아이들을 위해 48일을 굶고 계셨어요.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굶을 수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저도 따라서 굶어봤어요.

김진세 얼마나요?

김여진 목표는 일주일이었는데 4일 굶었어요. 너무너무 괴로웠어요. 사람이 굶어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겠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게 굉장히 사소한 문제라는 판단을 하게 됐죠. 또 그 와중에 연기자 동료들의 자살이 잇따랐어요.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가. 더 이상 나를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진세 거대한 벽을 뛰어넘은 셈이네요.

김여진 그죠.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행복하리라. 다른 거 안 하고 내가 행복한가, 안 한가에만 집중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결국은 나 혼자만 행복해서는 진짜로 행복하지가 않다는 결론에 이른 거죠. 그러니 내가 가진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죠. 물론 지금도 가끔 우울하고 힘들고 짜증나는 일은 있어요.

김진세 누구나 그래요, 여진씨.

김여진 오늘만 해도 오전 내내 제 마음이 송곳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웃음), 그렇다고 그걸로 괴로워하거나 아주 특별한 불행처럼 여기진 않죠.

김진세 요즘은 본인이 하는 일에서 행복감도 많이 느끼시고요?

김여진 네, 그래요. ‘난 행복해’라고 생각한다고 24시간, 매 순간이 행복하진 않잖아요. 주로 행복하고, 가끔 힘들 때가 있는 거죠. 다행인 건 예전처럼 남 탓을 하거나, 환경 탓을 하진 않아요.

배우로서 인정하는 감독이자 남편
김진세 남편분이랑은 지금 행복하세요?

김여진 네, 무난해요(웃음).

김진세 ‘무난’만 되어도 얼마나 다행인데요.

김여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서로 참 좋은 친구예요.

김진세 바깥분과는 합은 잘 맞으세요?

김여진 제가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과 결혼할 줄은 몰랐어요(웃음). 저도 그렇지만, 남편도 아주 개성이 강한 사람이고, 약한 면과 강한 면이 또렷이 구분되는 사람이에요. 자기 자신도 그 점을 알고 있고 용감하게도 저한테는 그걸 다 드러내 보여요. 가장 못났고 지질하고 우유부단하고 이런 면에 대해서도.

김진세 남편이랑 사시는 게 맞네요(웃음). 애인이랑은 그렇게까지 안 하잖아요.

김여진 그렇죠. 겉으로 드러나는 그 사람은 대작만 만드는 아주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이죠.
목소리 크고 남자답고 현장에서 욕도 잘하고, 그런데 집에서는 살림은 거의 다해요(웃음). 빨래하고 청소하는 걸 좋아해요. 제가 하는 걸 성에 차지 않아 한다니까요. 처음에는 약간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지금은 그냥 하는 일이 분할이 됐어요. 저는 요리, 그 사람은 청소.

김진세 요즘 하시는 사회활동에 대해서 바깥분의 견해는 어떠세요?

김여진 처음엔 굉장히 싫어했어요. 제가 보통 아내 같진 않잖아요? 하고 싶으면 그냥 하고, JTS의 경우 6개월 동안 상근하기도 했고, 한 달 동안 대학생들 데리고 인도로 봉사활동을 가기도 했으니까요. 당시에는 남편이 반대도 했다가, 허락도 했다가, 설득도 했다가…. 그런 과정을 2, 3년 겪었고 지금은 찬성도 반대도 안 해요. 다만 자기 나름의 낙을 만들어야겠다며 기타도 배우고, 사람도 만나고 그래요(웃음).

김진세 둘이 취미가 같으면 좋을 텐데요.

김여진 둘이 좋아하는 시간이 있어요. 저희 집에 귀가 안 들리는 조그마한 똥개가 있는데(웃음), 녀석과 함께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목욕시키고 밥 먹은 뒤에 남편은 기타를 튕기고 저는 책을 읽곤 하거든요. 지난 7년간 아무리 바빠도 주말이면 일부러라도 이런 시간을 가졌어요. 저는 우리 부부 하면, 이 시간이 먼저 떠올라요.

김진세 무척 평화로운 느낌이네요.

김여진 별 얘기는 안 하고 거의 시답잖은 농담하는 건데요(웃음).

김진세 그런 게 얼마나 중요한대요.

김여진 일단 같은 분야에서 일을 하니까 작정하고 영화를 볼 때면 2, 3일간 함께 보기도 해요. “연기가 어떻고, 컷이 어떠네” 하며 아주 프로페셔널한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 것도 좋고요. 그러다 부부싸움을 하기도 해요. “저기서 저 연기가 그런 의미가 아니지!”, “설정을 그렇게 잡으면 안 되잖아!” 이러면서(웃음). 재미있어요.

김진세 언젠가 바깥분께서 자신의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여진씨를 두고 “다른 드라마에 빼앗기기 싫었다”라는 말을 했는데, 저는 감동받았어요. 보통 그렇게 이야기하기 쉽지 않잖아요?

김여진 일할 때는 완전히 남남처럼 감독과 배우로 일해요. 일부러라도 안 부딪히려고 노력하죠. 다행히 배우와 감독으로서 인정하는 부분이 있어요. 싫으면 어쩔 뻔했어요?(웃음)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감독 데뷔를 했어요. 그런데 실은 첫 작품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비록 남편이 조감독이긴 했는데, 저는 차마 못 보겠더라고요. 게다가 저는 그게 또 얼굴에 티가 나요(웃음). 그런데 다음 작품하면서 되게 좋아졌어요. 남편의 색깔이 점점 드러났거든요. 남편은 정말 누구도 해내지 못할 만큼의 고생스러운 작품과 신들을 찍어내요.

김진세 멋진 부부네요. 성숙하다는 건 갈등을 어떻게 잘 풀어나가느냐에 달려 있기도 하니까요.

김여진 그런 면에서 많이 고맙죠. 사실 지금의 제가 하는 일이나 포지션을 웬만한 한국 남자는 견디기 어려울 수 있잖아요.

아이가 자라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요
김진세 요즘은 주부들의 사회 참여도 늘고 있어요. 보다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주부가 주체가 되어서 바꿔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김여진 저는
교육 문제라고 생각해요. 독일 학교에서는 선행학습이 금지되어 있대요. 교사의 권위나 의욕이 떨어지는 한편, 부모의 능력에 따라 아이들의 격차가 커지기 때문이죠. 저도 선행학습 금지에 찬성하거든요. 초등학생이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푼다고 영재라고 하는 게 도대체 말이 돼요? 그건 누군가 점수 매기기 좋기 위해서 하는 거지, 정상적인 게 아니죠. 부모들이 내 아이가 먹는 거, 내 아이가 하는 거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내 아이만 그렇게 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잖아요. 저는 아이가 없지만 누군가 아이를 낳으면 나는 그 아이가 자라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해요.

김진세 그렇다면 어머니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김여진 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거나 다른 나라 사례들을 좀 모아서 제안도 해보는 등 좀 더 적극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에게 경쟁에서 이기는 법이 아닌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거죠. 아이들이 좀 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얘기를 나눴으면 하고요. 이런 모임이 만들어져서 법제화하도록 추진도 해야 해요.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부모님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해주시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을 거 같아요.

김진세 교육이 바뀌면 나라가 바뀌죠. 그럼 주부 스스로는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김여진 제 경험으로 보자면, ‘재미’와 ‘의미’잖아요. 그걸 한꺼번에 찾을 수 없으면 따로따로 한 가지씩이라도 해보세요. 일단 누구나 정말 재밌어하는 일은 있을 거예요. 어떤 죄책감도 떨쳐버리세요. 저는 만화책 보는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일주일 중 하루는 ‘만화책데이’로 정하고 아예 쌓아놓고 봐요.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하고(웃음). 그렇게 동호회 활동도 해보세요. 어떤 취미든 떳떳하게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먹는 게 좋다? 그럼 그걸 취미로 삼으세요. 그런데 좋아하는 일만 하다 보면 ‘내가 이래도 되나?’ 싶잖아요. 그럴 때 자기 마음에 꽂히는 문제 한 가지에 집중해보세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문제랄까요. 길고양이, 유기견 문제가 마음이 아프면 그쪽으로 나서는 거예요. 재미와 의미 모두 많이도 말고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꾸준히 하셨으면 좋겠어요.

김진세 그렇게 하면?

김여진 그 두 가지를 함께하면 마음이 풍족해지는 게 있어요. 그렇게 하다 보면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나도 좋고, 또 세상에 기여하는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사람을 만나요.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니까 삶의 질이 올라가죠. 또 좋은 대화 나누고 좋은 방법 연구하고…. 사실 그러면서 노는 거예요.

김진세 ‘소셜테이너’라는 얘기 들으시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여진 사회활동을 하는 연예인이라는 뜻일 텐데, 저는 솔직히 좋지도 싫지도 않아요. 왜냐면 제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는 거니까요. 지금 그렇게 보이나 보다, 생각하는 거죠.

김진세 앞으로의 계획을 들을 수 있을까요?

김여진 저는 정말 계획을 안 세우는 편이에요. 아까도 말씀드렸던 거처럼 무조건 행복하고 말겠다는 게 크죠. 질타를 들을 때도 있을 거고,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일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건 사람들이 보는 시선이고요. 저는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할 거라는 거죠. 그것만 까먹지 않으면 될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게 어려운 게, 사람들이 칭찬하면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할 거 같아서 싫은 데도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어떤 기대가 있건, 저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그만둘 거예요.

김진세 여진씨의 직업과 지금 하시는 활동이 어쩌면 상충되는 순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의 삶이란, 홍대 청소 노동자 아주머니들이 평생 벌어도 못 사는 가격의 옷을 입기도 하잖아요. 그런 괴리감은 어떻게 극복하세요?

김여진 그 부분에 있어서 한 가지 정리한 건 있어요. 예를 들어 한 벌에 100만원이나 하는 비싼 옷이 있어요. 그럼 저는 ‘내가 이걸 사면 행복할까?’를 생각해요. 왜 행복할까? 입었을 때 기분이 좋을까? 사람들이 어떻게 쳐다볼까? 이런 걸 따져보고 그럼에도 가치가 있는 옷이라는 판단이 들면 살 거 같아요. 하지만 그다지 입고 갈 데도 없고, 누가 예쁘다고 해주는 것도 잠깐이고, 또 아까 말씀하셨듯이 그 돈 100만원이면 어려운 분들에게 뭔가 해드릴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면 안 사죠.

김진세 그런 걸로 비판을 받은 적은 없으세요?

김여진 지금까지는 다행히 제가 비싼 취미를 갖거나 비싼 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적은 없어요. 가끔 ‘아주 예쁘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긴 하지만(웃음), 그때는 잠깐 생각을 해보죠. ‘가지는 것보다 매일 와서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웃음).

김진세 그게 제일 힘들 거 같아요. 사실은 아까도 얘기하신 것처럼 남들 눈에 보이는 직업이잖아요. 보이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해야 할 것이 있으니까요.

김여진 그렇죠. 또 그걸 이용해야 하는 직업이기도 하죠. 저와 함께하는 트위터 친구들을 ‘날라리 외부 세력’이라고 이름 지었잖아요? 그 이름이 맞는 게, 제가 저를 잘 아는 거죠. 제가 주체가 되어 어떤 정치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아니라는 거예요. 청소 노동자의 문제, 사실 그분들이 풀어야 해요. 그분들이 가장 일선에서 싸우고 요구하셔야 해요. 그분들이 싸우지 않는데 제가 나설 수는 없잖아요? 저는 응원 세력인 거죠. 어떻게 보면 오지랖이기도 한데, 그걸 인정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데 쪼개서 가거나 피곤한데 일부러 가진 않아요. 딱 정해놓은 선이 있어요. 간섭받지 않고, 간섭하지 않아요.

김진세 그게 옳아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움을 강요받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는 있어요.

김여진 강요까지는 아니고, 당연히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김진세 그런 암묵적 강요가 사실은 더 힘들거든요.

김여진 그래서 거절을 했을 때, 오히려 상대가 실망을 하게 돼요. 근데 그건 감수해야 해요. 배우가 이런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두 가지로 봐요. ‘블랙리스트! 그러다가 찍혀서 배우도 못한다’는 시선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서 인기 좀 얻으니까 좋냐?’라고도 보죠. 한쪽에서는 제가 득을 봤다고 생각하고, 반대편에서는 손해 볼 거라고 지레 겁을 먹잖아요. 사실 둘 다 아니거든요(웃음). 어쩌면 둘 다 맞을 수도 있고요.

김진세 어떤 의미에서요?

김여진 활동을 하기 전보다 사람들이 저를 많이 찾죠. 물론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강연이나 토론 프로그램 같은 거지만(웃음). 이렇게 득을 본 건 있다는 거죠. 반면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으니 밉보여서 CF 같은 건 안 들어올 거고요(웃음). “그 배우를 꼭 써야 돼?”라는 한마디가 무서운 거잖아요.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거 알고 한 거거든요.

김진세 무슨 말씀을요. ‘CF 여왕’보다 더 인기 있고 사랑받는 ‘트위터 여신’이잖아요? 흔들리지 않는 여진씨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아요.

김진세의 에필로그
무조건 행복해지고 싶다면, 김여진처럼 ‘균형 잡기’


도대체 ‘날라리 외부 세력’은 뭘까? 배우 김여진에게 생긴 의문의 시작이었다. 대학교 청소용역 아주머니의 투쟁에 왜 잘나가는 여배우가 나설까? 정의를 위한 싸움에 직업이나 신분의 구분이 없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흔치 않은 일이었다. 듣자하니 여기저기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독문학을 전공한 이대 나온 여자가 연기를 공부한 적도 없이 신인상과 여우조연상을 휩쓴 연기파 배우가 되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아주 강하고 드센 여자는 아닐까? 강함이 그녀의 힘일까? 그러던 어느 날, 소통의 기회가 생겼다. 필자와 같은 잡지(「빅이슈」)에 칼럼으로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는 ‘핑계’로 트위터에서 말을 걸어보았다. 자신을 ‘순하다, 정말이다’라고 소개해놓은 대로 그녀는 절대 강하지도 드세지도 않았다. 밤이면 ‘트친(트위터 친구)’들을 향해 ‘사랑해요. 잘 자요’ 라고 잠자리 인사를 건네는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간혹 전해주는 ‘투쟁’의 이야기마저 그녀는 부드럽게 속삭인다. 그렇다면 부드러움이 그녀의 진면목일까? 강함과 부드러움. 두 극단의 모습은 어떻게 그녀의 힘이 되었을까?

어릴 적 그녀는 말 그대로 ‘범생이’였다.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공부 잘하고 선생님께 칭찬은 듣는데 주변 친구들에게 관심 별로 없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러다 사춘기 시절, 한 친구 덕(?)에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모범생의 생활을 청산한다. 그러고는 반항적인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학생운동과 연애를 동시에 해냈다. 당시 분위기로는 절대 공존할 수 없었던 ‘활동’을 그녀는 함께한 것이다. 결혼생활도 재미있다. 이상적인 결혼이라면 연인을 꿈꾸어야 하고, 현실적이라면 친구라야 한다. 그런데 그녀와 남편은 연인과 친구의 중간 정도라고나 할까. 사회 참여도 마찬가지이다. ‘소셜테이너’라고 불리는 그녀는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뛰어들어 함께한다. 하지만 본업을 팽개칠 정도로 지나치지는 않다. 여전히 연기자로서 최고가 되길 꿈꾸며 산다.

그녀에게는 ‘균형’이라는 긍정의 힘이 있다. 다른 어떤 긍정의 힘보다 이루기 힘든 것이 균형이다. 몰입, 열정, 배려 등 많은 긍정의 힘 중에 최고이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라도, 균형을 잡지 못하면 독단적이 될 수 있다. 몰입에 빠져 있다 보면 남이 보이지 않고, 열정은 주위 사람을 들뜨게 해 분에 넘치는 과욕을 부리게 하고, 배려는 남 생각에 자신을 지워버리는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긍정의 힘은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

그래서 균형이 필요하다. 균형 잡힌 바퀴는 쓰러지지 않는다. 방향성만 있다면 결코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다. 자신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의 행복을 걱정하는 것도, 그 걱정 끝에 실행에 옮겼지만 결코 자신의 일을 놓치지 않는 것도, 투사와 여배우가 함께 존재하는 것도, 결코 지치지 않고 두 가지 모두를 잘 해내는 것도 모두 균형의 힘이다.

균형에도 함정은 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자신의 색깔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될 듯하다. 그녀는 선명하다.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삶의 뚜렷한 목표가 있으니 말이다.
꿈을 꾸어본다. 개인과 사회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여배우가, 아름다운 그 여배우가 무조건 행복해지는 날을.

긍정의 힘을 더하는 선물_「그녀는 예뻤다」
5월의 어느 날. 대학등록금 인상 반대를 위한 1인 시위를 나가면서도, 김여진씨는 트위터에 ‘디따 예쁘게 하고 해야지’라고 했더군요. 기죽지 않겠다는, 혹은 보란 듯이 서겠다는 여배우의 자존심이 녹아 있는 맨션이지요.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실은 마음에서 나오잖아요. 얼마를 들여서 성형을 하든, 그 애티튜드는 바꿀 수 없으니까요. 그녀를 만나고 든 생각이 ‘마음씨가 참 곱다’였습니다. 그러니 예쁠 수밖에요.

그래서 이달에는 「그녀는 예뻤다」라는 책을 골랐습니다. 힘들수록 더욱 치열하게 살며 절망 속에서 희망의 꽃을 피운 15명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마를린 먼로, 마리아 칼라스, 이사도라 던컨 등이 주인공인데요. 우리에게는 그녀들 못지않은 김여진씨가 있다는 생각에 내심 흐뭇해집니다.

* 김진세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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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 김여진 편을 읽고 애독자 엽서에 소감을 적어 보내주시는 독자 중 10분을 선정해 「그녀는 예뻤다」(랜덤하우스코리아)를 보내드립니다.


김여진은…
1974년생. 의대가 아닌 독문과에 진학한 것이 부모를 향해 든 첫 번째 반기였다면, 대학 4년 내내 철거촌 빈민과 노동자들과 함께하며 투쟁의 현장에 머물렀던 것은 본격적인 ‘행복 찾기’였을 것이다. 우연히 본 연극에 매혹되어 대학로 극단 활동을 거쳐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데뷔, ‘박하사탕’, ‘취화선’, 드라마 ‘이산’, ‘대장금’ 등으로 연기 참 잘하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지난 2004년에는 MBC 김진민 PD와 결혼, ‘신돈’, ‘로드 넘버원’ 등에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일방적인 해고 통지를 받은 홍대 청소 노동자들의 농성 현장을 찾아 밥과 고민을 나눈 사실이 알려지며 그녀의 숨은 사회 참여 활동이 수면 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00분 토론’에 출연해 천정부지로 치솟는 대학등록금에 대한 소신 발언을 하고, 해군기지 건설로 몸살을 앓는 제주도 강정마을을 찾는 등 김여진은 우리 사회의 아픈 부위를 쓰다듬는 은근하고 따스한 존재로 그 힘을 더하고 있다. 트위터 @yohjini

김진세 박사는…
여자보다 더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고려제일정신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으며, ‘행복연구소 소감’을 통해 기업체를 대상으로 임직원의 스트레스 관리와 행복 찾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행복 멘토’라 불리고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그의 또 다른 재주는 글쓰기. 다년간 여러 매체에 메디컬 칼럼을 써왔으며 노숙자의 자립을 위한 잡지 「빅이슈」에 ‘김진세의 Love Myself’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흔의 심리학」(공저), 역서 「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 외 고민 많은 20대 여성에게 보내는 세심한 위로를 담은 「심리학 초콜릿」, 행복한 시작을 위한 심리학 처방 「스타트 신드롬」, 행복한 삶으로의 변화를 소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애티튜드」가 있다. 트위터 @happy_men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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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임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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